조회수 12 작성자 아이**04 등록일 2026-07-31 좋아요 0
도서명2026 힐링하는 글쓰기 작품집: 마음이 빛이 될 때
저자권희정, 김영락, 민경, 수연, 안시아, 엄다솜, 이민혁, 정솔, 정명섭
출판사실로암점자도서관
[소설] 숲속의 테라스
할아버지가 편찮으셨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생 때라 아프다는 것만 알았지, 왜 아프신지, 그 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랐다. 어느새 할머니, 할아버지는 캐리어를 가지고 동남아시아에 있는 태국이라는 나라로 떠나셨다.
그해 겨울, 나도 아빠, 엄마, 동생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간 것은 초등학생 시절이었다. 치앙마이 국제공항에서 꼬박 하루를 가야 도착하는 치앙마이. 거기서도 구불구불한 비포장된 산길과 나무 대문에 들어섰는데도 끝없이 이어진 산길을 한참을 올라가서야 나오는 작은 오두막 하나. 부겐베리아(덩굴식물)가 흐드러지게 펴서 장식한 나무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셨다. 차에서 내려 맞은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집과 그 옆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멋진 테라스가 펼쳐져 있다. 그 테라스에는 신기하게도 벽난로가 있다. 처음에 이것을 봤을 때는 이 집에서 벽난로를 쓸 일이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그 의문은 다음날에 풀렸다. 이 나라는 한낮에는 무척 덥지만 아침과 저녁에는 쌀쌀하기 때문이다. 이 집이 숲속에 있어서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할아버지는 장작을 벽난로에 넣고 성냥으로 불을 붙여 모닥불을 피워주셨다. 우리 남매는 벽난로 맞은편에 있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앉아 타닥타닥 타오르는 아름다운 모닥불을 바라보며 진정한 불멍을 즐겼다.
보글보글.
우리가 불멍을 하는 동안 집 안에서는 아침 준비가 한창이었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와 반찬들이 만들어지고, 테라스 테이블 위에 하나씩 하나씩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곧 이곳은 아름다운 야외식당이 되었다. 자연의 소리를 벗 삼아.
한낮이 되면 테라스는 나와 동생의 놀이터가 된다. 대표적으로 우리가 한 놀이는 2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종이 인형극 놀이.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자연 속에서 노는 것은 좋았지만 그렇게 놀아도 그날따라 재밌지 않고 심심하기만 했다. 우리 남매는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 늘어져 앉아 있었다.
“안 심심해?”
“심심해.”
“뭐라도 만들까?”
“뭘?”
“음…… 종이 인형 연극?”
“그럴까나.”
“네가 할머니께 가서 작은 상자 있나 물어봐봐.”
“내가? 싫어. 누나가 가.”
“그럼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싫은데…….”
“어서~. 안 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동생은 툴툴거리면서도 가위바위보를 해주었다. 동생은 주먹, 나는 보를 냈다.
“네가 졌으니까 얼른 갔다 와.”
“알겠어.”
동생은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혹시 작은 상자 같은 거 있어요?”
동생이 묻자 할머니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작은 상자? 뭐 하려고?”
“누나랑 종이 인형극 만들려고요. 그래서 연극 상자로 쓸 작은 상자가 필요해요.”
동생의 뜻밖의 대답에 알겠다고,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씀하셨다.
“맨날 눈만 마주치면 싸우던 애들이 오늘은 웬일이래? 그래, 한번 찾아볼게.”
할머니는 한참 집안을 구석구석 찾아보시더니 작은 종이 상자 하나 가져다주셨다.
“이 정도 크기면 적당하니?”
할머니께서 작은 소품들이 한꺼번에 들어갈 법한 크기의 상자를 내미셨다.
“네, 딱 알맞은 크기예요.”
그렇게 동생은 상자를 가져왔고, 나와 동생은 테라스에 있는 딱딱한 나무 소파에 앉아 각자 종이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대본을 써 내려갔다. 대본을 다 쓴 뒤에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종이에 등장하는 동물의 그림을 그린 뒤, 가위로 오리고 그림의 윗부분에 구멍을 뚫었다. 그 구멍에 실을 넣은 뒤 상자 안에 넣은 뒤 끝부분을 종이 인형에 뚫린 구멍에 연결시켰다.
“할머니, 연극 다 완성했어요!”
나는 부엌에서 한창 설거지를 하고 계시던 할머니께 달려가 연극을 완성했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할머니께서는 진정하라는 듯 싱크대 옆에 있는 휴지에 손을 닦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래, 완성했구나. 잠시만 기다려 줘. 설거지 마저 다 하고 금방 갈게.”
“네!”
그렇게 몇 분 뒤 일을 마치신 할머니와 엄마, 할아버지는 테라스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았다. 관객들이 입장하고 착석하자 각각 공주가 그려진 잠옷과 히어로가 그려진 잠옷 바람의 남매의 어설픈 종이 인형극이 시작되었다. 초등학생이 만든 재미없고 밋밋한 이야기였지만 관객은 열심히 봐주셨다.
할머니와 엄마, 할아버지는 남매의 종이 인형극들을 본 뒤 박수를 보냈다. 아주 환한 미소와 칭찬과 함께.
두 번째: 종이 상자 집 만들기
새 냉장고가 생겼다. 상자만 남자 또 다른 장난감의 재료가 되었다. 집 안에 장난감이 따로 없던 터라 장난감 집을 만드는 것이 재밌었다. 장난감 집을 만든다고 쓰긴 했지만 어린 애들이 무슨 완벽한 장난감 집을 만들 수 있겠는가. 상자에다 연필로 창문과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면 완성! 상자 뚜껑은 자연스럽게 현관문이 되었다. 다 만든 뒤에는 진짜 집을 만든 것처럼 뿌듯했다. 낮이 되면 서로 상자 집에 들어가서 놀겠다고 싸우는 일이 일상다반사였다. 그래도 둘 다 집이 망가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는지 조심히 갖고 놀았다.
똑똑.
“누구세요?”
“택배 왔습니다.”
“택배 안 시켰는데요.”
문은 열리지 않았다.
“왜 대본대로 안 해?”
“내 마음이야.”
이렇게 싸워도 상자를 찢으며 싸우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찾은 장난감이었으니까.
그러나 다음 해에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 그 상자 집은 없었다.
“그 상자 집은 어디에 있어요?”
내 질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서로 고개를 돌려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 남매를 쳐다보았다.
“그게…… 우기 때 눅눅해져서 버렸어. 미안하다. 어쩔 수 없었어.”하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나는 ‘우기’라는 말이 낯설어 되묻고 싶었지만,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상자 집은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되면 늘 받는 질문이 있다.
“뭐 먹을래?”
항상 물어보시는데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따라 특별한 것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대답도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할머니가 저녁 메뉴 선택지를 주셨다.
“아까 시장에서 사 온 과일도 있고, 밥이랑 된장찌개를 먹어도 돼. 그리고…….”
또 무슨 선택지가 남아있는 걸까 싶었다.
“아까 등갈비를 샀잖아, 그걸로 바비큐를 해 먹어도 돼.”
바비큐라니. 이 산속에서, 그것도 오븐도 없이 가능하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오븐도 없는데 가능해요?”
“가능하고 말고. 벽난로를 쓰면 되니까.”
“벽난로를 쓴다고요?”
처음에는 이게 가능한 일인 것인가 의문이 생겼다.
“여보, 벽난로에 장작 넣어서 불 좀 피워줘요.”
“알겠어.”
“아버님, 도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할아버지와 아빠는 벽난로 옆에 있는 장작을 하나씩 넣고 불을 피우셨다.
타닥타닥.
할머니는 엄마와 그 조그만 부엌에서 고기를 접시에 펼치셨다.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해서 마리네이드를 했다. 그 고기가 숙성되는 동안 큰 유리그릇에 갖가지 채소를 넣고 물에 담가 씻었다. 모든 준비 과정을 마친 고기는 접시에 담겨 아빠의 손으로 옮겨졌다. 집개로 고기를 집은 아빠는 벽난로에 설치한 석쇠 위에 솔로 소스를 바른 등갈비를 하나씩 하나씩 올리셨다. 오븐처럼 장치가 없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지글지글 바비큐가 구워지는 소리와 주변 가득 퍼지는 양념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그 냄새가 얼마나 좋은지 테라스 울타리 너머로 옆집에서 키우는 개 두 마리가 혓바닥을 내밀고 우리가 앉아 있는 벽난로를 향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따가 다 먹고 뼈다귀라도 줘야겠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곧 바비큐가 다 구워졌다. 엄마와 할머니는 집 안에서 테라스를 왔다 갔다 하시며 접시와 수저, 컵들을 가져오셨다. 바비큐가 담긴 접시를 식탁 가운데에 놓고 갖가지 반찬들을 정갈하게 놓으니 근사하고 먹음직스러운 한 상이 차려졌다. 기온이 낮아 춥긴 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식사를 꼽으라 한다면 그 모닥불 바비큐를 꼽을 것이다.
10시가 넘어 잘 시간이 되면 침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쪽 난간이 없는 계단은 내가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다.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불안감에 항상 올라가기가 무서웠다.
“손잡아. 밑에 잘 보고.”
엄마가 손을 안 잡아 줬다면 나는 평생 침실로 가는 길에 오들오들 떨었을 것이다. 계단 끝에는 널찍하고 짧은 복도와 함께 양쪽 벽 끝이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방 모양도 똑같았다.
산골에 있는 집이기 때문에 이불 위를 기찻길마냥 나란히 지나가다 죽은 개미를 볼 때면 매번 깜짝깜짝 놀랐다.
“아이, 또 개미가 이불 위에 죽어 있어!”
나는 늘 개미를 볼 때면 소름이 끼쳤다. 우리가 개미집을 파며 놀면 죽일 듯이 달려드는 놈들이 남의 집에서는 대놓고 들어와 죽어 있다니……. 우리는 한숨을 쉬며 개미를 치우고 자리에 누웠다.
“엄마, 책 읽어줘~.”
“엄마, 나도 읽어줘.”
“엄마 피곤한데…… 그냥 자면 안 될까?”
그러나 나와 동생은 그렇게 금방 잠들지 않는다. 밖에 불빛 하나 없어 무섭기도 한 이유도 있었다.
“휴……, 알겠어. 대신 딱 1개만 읽어줄 거야. 그거 듣고 자자. 알겠지?”
엄마는 백기를 들었다. 우리는 엄마 양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얘들아……, 조금만 떨어져서 누워. 그렇게 꼭 달라붙으면 책을 읽을 수가 없잖아.”
“네.”
우리는 고쳐 누웠다.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고요해진 자연과 함께.
@@{오페라의 유령의 과거
오페라의 유령 프리퀄
에릭은 오페라하우스에서 일하는 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축하드립니다. 왕자님입니다.”
의사가 갓 태어난 아기를 산모 옆에 눕혔다. 산모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옆에 누워있는 아기를 바라보았다.
“정말 건강한 사내아이군. 이 아이 이름을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남편이 아내의 손을 잡아주며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고민했다.
“음……. 당신 이름인 ‘에델바이스’의 ‘에’와, 내 이름, ‘릭토르’의 ‘릭’을 붙여 ‘에릭’으로 지으면 어떨까?”
에릭을 낳느라 기운이 없었던 에델바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가야, 네 이름은 에릭이란다.”
릭토르가 주먹을 꼭 쥔 에릭의 손을 잡았다.
에릭은 7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오페라하우스에 갔다. 부부가 일하는 동안, 에릭은 혼자 오페라하우스를 놀이터 삼아 돌아다녔다. 무대 세트장도 구경하고, 오페라 가수들의 노래도 미숙하게나마 따라 불렀다. 운이 좋으면 오페라 가수, 무용수들의 연습도 볼 수 있었다. 연습이나 리허설을 볼 때면 에릭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서 홀린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용수들은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몸을 싣고 춤을 췄으며, 가수는 꾀꼬리처럼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다.
15살이 된 에릭은 그날도 오페라하우스에 갔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는 잠시 쉬기 위해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자니 지루하고 심심했다. 마침 아무도 없겠다, 지루함을 달랠 겸 지금까지 리허설을 보며 알게 된 노래를 가성으로 조그맣게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를 부르니 기분이 좋았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지루한 생각이 사라질 때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에릭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에릭은 노래를 멈추고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하던 노래를 멈추지?”
“네?”
“목소리가 참 듣기 좋아. 노래도 잘 부르고. 노래를 마저 다 불러줄 수 있겠니?”
남자가 부드럽게 말하며 부탁했다.
“하지만 제 노래는 다른 사람에게 들려드릴 만큼 좋은 실력이 아닙니다. 그저 어설프게 따라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괜찮아. 불러봐.”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았다. 에릭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계속되는 남자의 설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처음부터 다시 부르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노래를 끝내자 남자는 박수와 함께 에릭의 노래를 칭찬했다.
“참 잘 부른다. 혹시 노래를 정식으로 배워볼 생각 없니? 내가 보기에 너는 아직 잘 안 다듬어진 원석 같아. 네가 그 노래 실력을 극단에 들어와 열심히 다듬다 보면 보석과도 같은 노래 실력을 쌓을 수 있을 거야. 한 번 생각해봐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서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내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에릭은 그 남자가 한 말을 곱씹었다.
“엄마. 저 극단에 들어가서 노래를 본격적으로, 더 깊이 배워보고 싶어요.”
“안 돼.”
에릭의 말에 에델바이스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네? 왜 안 돼요?”
“네가 노래를 좋아하는 건 안다만, 나는 반대다. 지금 너는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해. 무작정 그렇게 정하고 계속하다가 나중에 다른 것을 새로 시작하고 싶어도 못 할 수도 있어. 좀 더 생각해보렴.”
“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이 노래밖에 없었다. 에릭은 틈틈이 노래 연습을 하며 꿈을 키웠다.
“에릭. 집에 가자.”
일이 다 끝난 부부가 17살이 된 에릭을 불렀지만, 에릭은 리허설 관람에 집중하느라 부부의 말을 못 들었다. 한참 후에 리허설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 에릭은 뒤를 돌아 부모님을 봤다.
“엄마, 아버지. 오셨어요? 언제 오셨어요?”
“네가 리허설을 보고 있을 때 왔단다. 오페라가 그렇게 좋니?”
“네. 오페라 노래들은 저를 매료시켜요. 저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한참을 의논했다. 그리고 에릭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가 에릭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알겠다. 네가 극단에 들어가는 걸 허락하마.”
“하지만 먼저 단장님의 허가가 필요하단다. 내일 한 번 가서 말씀드리러 가 보자.”
“네!”
다음날. 세 사람은 오페라 극단 단장을 찾아갔다. 단장은 부부와 에릭의 말을 들어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도 지나가면서 네가 노래하는 것을 자주 들었단다. 단원으로 뽑고 싶을 만큼 잘하더구나. 하지만 네가 겉으로 본 것들이 전부가 아니란다. 스포트라이트 뒤에서는 혹독한 연습과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어. 상당히 힘든 일이지. 가볍게 생각하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도 하겠니?”
“네. 저는 극단에 들어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너는 노래 실력도 괜찮으니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좋아. 그럼 한 번 레슨을 받아 보렴.”
단장의 말에 에릭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에릭은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레슨은 내일 오전 10시, 오페라 극장 1연습실이다. 늦지 말거라.”
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나갔다.
“축하한다, 에릭, 열심히 해보렴.”
에릭은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 일찍 침대에 누웠다. 그는 오페라공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잠들었다. 기분 좋게 푹 자니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제 있었던 일이 마치 꿈같았다. 혹시 진짜 꿈인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뺨을 꼬집었다.
“아야!”
아팠다. 에릭은 손으로 뺨을 문질렀다. 너무 아팠지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기에 기뻤다. 에릭은 나갈 준비를 마친 뒤, 부모님과 함께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오페라하우스에 들어가자 부부는 에릭에게 충고와 포옹을 했다.
“에릭, 열심히 하렴. 항상 네 마음을 잘 다스려. 그게 제일 중요하단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감정에 휘둘리기만 하면 소중한 것들과 시간을 놓치게 된단다.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즐기렴. 그 무엇보다 즐기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란다.”
“네. 명심할게요.”
부부는 그 말을 듣고 일하러 갔고, 에릭은 단장이 말해 준 연습실로 갔다.
똑똑.
“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에릭 웨스트입니다.”
“아~ 네가 에릭이구나? 들어오렴. 단장님께 네 얘기는 들었단다. 들어오렴.”
선생님은 에릭을 반갑게 맞이했다.
“여러분, 잠시만 주목해주세요.”
선생님이 손뼉을 쳤다. 단원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선생님을 보았다.
“오늘 새 단원이 들어왔어요. 소개하겠습니다. 이름은 에릭이에요. 에릭, 인사하렴.”
“안녕하세요. 에릭 웨스트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단원들은 박수를 치며 에릭을 환영했다.
극단에 들어온 기쁨도 잠시뿐, 혹독한 레슨이 시작되었다. 스트레칭과 요가로 뻣뻣한 몸을 풀어주고, 본격적으로 레슨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한 수업은 발음 연습이었다. 노래를 잘 부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발음이 정확해야 했다. 이뿐만 아니라 춤, 노래 등 다양한 수업을 받았다.
“에릭! 이게 몇 번째니? 호흡이 전혀 안 맞잖아!”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좀 더 집중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쓴소리에도, 연습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단원들 앞에서도 그는 꿋꿋하게 버텨가며 계속 열심히 연습했다.
‘아직 실력이 많이 부족해. 이래서는 다른 단원들을 따라잡기 어려워. 연습을 좀 더 열심히 해야 해. 그런데…… 어디서 연습하지?’
저녁에는 부모님도 쉬셔야 해서 집에서는 하기 어려웠다. 그는 어디 연습할 곳이 없을까 고민했다.
‘아, 그래. 이 연습실은 밤에도 열어 둔다고 했으니까 밤에 여기서 연습해야겠어.’
“자.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 모두 수고 많았어요. 그리고 크리스는 잠깐 선생님 좀 도와줄 수 있니?”
“네. 미안해, 다니엘, 기껏 약속까지 잡았는데 오늘은 너 먼저 가.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아냐,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니. 너무 신경쓰지 마.”
“고맙다. 다음에 밥 살게. 그럼 내일 봐.”
“그래.”
다니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크리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가자. 내가 저녁 사줄게.”
“네? 크리스 선배는요?”
조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못 올 것 같대.”
조와 찰리의 얼굴에는 실망과 울상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애들아 왜그래~ 오늘 같이 못 먹는다고 다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잖아. 내가 저녁 사줄테니까 기분 풀자. 응?”
“네.”
조와 찰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저녁을 먹으며 술이 한 잔씩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가 나서 얼굴을 찡그렸다.
“조, 왜 그래?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저 너무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무슨 일 있었어?”
다니엘은 깜짝 놀랐다. 조가 이렇게 화를 낸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선배도 아시다시피 크리스 선배는 아무도 안 봐주고 무뚝뚝하시잖아요.”
“그렇지.”
“저랑 찰리가 연습을 봐달라고 할 때는 딱 잘라서 거절하시더니, 얼마 전에 새로 들어 온 그 웨스트라는 애는 부탁도 안했는데도 잘 봐주더라고요. 그래서 차별받는 것 같아서 좀…… 서러워요. 웨스트가 부러우면서도 짜증이 나요.”
“그랬구나. 너희 입장에서는 속상했을 수 있겠구나. 내가 크리스한테 너희도 좀 봐달라고 말해볼게.”
“정말요?”
“아니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희가 말씀드려 볼게요. 직접 말하는 게 더 진심이 통할 테니까요.”
찰리의 말에 조는 놀라서 당장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찰리가 허벅지를 꼬집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맞아요. 계속 다니엘 선배님께 부탁하기도 죄송하기도 하고요. 오늘 이야기 들어줘서 감사해요. 저희는 들어가 볼게요.”
“그래, 잘 가.”
“야야, 아까 왜 그런 거야? 너 때문에 좋은 기회 날렸잖아.”
조가 찰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찰리에게 말했다.
“너, 바보냐? 우리가 거절 당한게 몇 번인데 선배가 들어줄 것 같아?”
“그럼 아까는 왜…… 말할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말한 거야?”
“왜겠냐? 우리 타깃은 선배가 아니거든.”
“그럼 누군데?”
조의 질문에 찰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이 바보를 어떡하면 좋을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찰리였다.
“웨스트 말이야. 우린 걔를 심리적으로 압박해서 걔가 선배를 못 만나게 만들면 돼.”
“그럼 웨스트부터 잡아와야겠네.”
“그렇지,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가네.”
찰리는 웃음을 지었다.
에릭은 집으로 가는 척하며 휴게실로 갔다가, 단원들이 모두 간 것을 확인한 후에 다시 연습실로 들어갔다.
실수가 있을 때는 고쳐질 때까지 계속 반복연습을 했다. 그렇게 에릭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심히 연습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몇 주 후에는 다른 단원들의 실력과 비슷해졌다. 급속도로 쌓이는 에릭의 실력에 다른 단원들은 너무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놀라기는 레슨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뻣뻣했던 에릭의 춤은 부드러워졌으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 후로도 에릭은 밤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을 계속해나갔다. 자기 자신에게 엄하게 대하면서까지 미숙한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했다.
“에릭. 제법인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릭은 하던 연습을 멈추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에릭의 질문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에릭에게 다가왔다.
“우리 전에 한 번 만난 적 있는데, 기억나니? 몇 년 전에 복도에서 봤었는데.”
에릭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 4년 전에 복도에서 자신의 노래를 칭찬해주고, 극단에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던 남자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혹시 전에 제 노래를 들어주셨던 분이신가요?”
“그래. 이제 기억이 났나 보구나. 내 이름은 크리스 그린트야. 극단에 들어오고 나서 나와 대화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었어.”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그래, 네가 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어서, 혹시 혼자 연습하지 않았을까 한 번 와본 거야. 아주 잘하더라.”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걸요.”
“네 실력 정도면 아주 잘하는 거야. 너만 괜찮다면 내가 너의 연습을 봐주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에릭은 뜻밖의 제안에 놀랐다. 제일 실력이 뛰어나고 인기도 많은 크리스 선배가 극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햇병아리인 에릭에게 관심을 가져 준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흔히 오는 기회가 아니었다.
“많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크리스는 에릭과 함께 연습할 때마다 에릭을 잘 봐주고, 부족한 점이나 틀린 부분이 있으면 고칠 수 있게 도와줬다. 에릭은 크리스의 레슨을 받으며 열심히 연습했다.
그렇게 연습을 하며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페라극장 복도 게시판에 공고문이 하나 붙었다. 단원들은 게시판 주위에 모여들었다. 에릭과 크리스는 단원들이 가고 난 후 게시판 가까이 다가가 찬찬히 공고문을 읽기 시작했다.
오페라 ‘마술피리’ 주인공 오디션 안내
‘마술피리’ 공연이 확정되어 주연을 뽑는 오디션을 실시합니다.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날짜: ○월 ○일
시간: 오후 2시
장소: ▲▲강당
지원 대상자: 극단 단원
“우와! 저 이 오디션 나가보고 싶어요.”
“보통 공연주인공은 오페라 가수 중에서 뽑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우리 극단 단원 중에서 뽑네. 이건 좋은 기회야. 에릭, 우리도 오디션에 나가보자. 오늘부터 합숙 훈련이다. 간단하게 세면용품이랑 옷들만 챙겨와.”
“네.”
에릭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짐을 챙겼다.
“에릭. 무슨 일이길래 갑자기 짐을 싸고 있는 거야?”
에델바이스가 물었다.
“며칠 후에 공연 오디션이 있어서 나가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아는 선배와 함께 합숙 훈련을 하기로 했어요.”
“그렇구나. 열심히 하렴.”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 갔다 오렴.”
그날부터 둘의 피나는 노력이 시작됐다. 레슨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에만 매진했다. 부드럽지만 때론 차갑게.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했다. 레슨이 끝나면 둘이 함께 나갔는데, 그런 행동을 계속 봐온 몇몇 단원들은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웨스트, 할 말이 있으니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
한 번도 얘기를 해 본 적 없는 찰리 글라스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러나 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어느 인적 드문 방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조가 있었다.
“데려왔어.”
그 말을 들은 조는 씩 웃더니 손바닥으로 에릭의 왼쪽 뺨을 힘껏 때렸다.
촥!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에릭은 그 남자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 바로 왼손으로 뺨을 문질렀지만 너무 따갑고 아팠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에릭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조와 찰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고? 너 나랑 장난하는 거냐? 너, 크리스 선배를 어떻게 구워 삶았지? 선배는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봐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먼저 친절하게 손을 내민 건 크리스다. 그를 구워삶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전 그런 짓 한 적 없어요. 크리스 선배가 먼저 봐주신 거라고요.”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에릭의 대답이 어떻든, 이미 화가 난 조와 찰리는 에릭을 벽으로 밀어붙여 심한 욕설, 나중에는 감정에 북받쳐 폭력까지 휘두르기 시작했다. 에릭은 꼼짝 못하고 맞다가 끝내 기절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일어나. 레슨 받으러 가야지.”
찰리가 바닥에 누워있는 에릭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깨웠다. 에릭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잘 들어, 햇병아리. 절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티 내지 마. 만약 그랬다가는, 너뿐만 아니라 크리스 선배의 안 좋은 소문도 퍼트려서 너와 함께 이 극단에서 퇴출시킬 테니까. 알아들었어?”
에릭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레슨이 끝나고 크리스가 에릭을 불렀다.
“에릭, 연습하러 가자.”
크리스의 말에 에릭은 잠시 망설였다. 크리스와 연습을 하고 싶지만, 조와 찰리의 눈치를 자꾸 보게 되었다.
‘크리스 선배와 연습하고 싶어. 하지만… 내가 크리스 선배와 있으면 저 사람들이 크리스 선배까지 괴롭힐지도 몰라.’
“저……”
“에릭. 크리스 선배랑 연습하고 와. 우리랑은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니까, 어서 가봐.”
찰리가 에릭의 연습을 허락해주자 에릭은 약간 불안했다. 이렇게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는데.
“끝나고 얼른 와. 알겠어?”
찰리가 에릭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에릭은 고개만 끄덕였다.
“선배. 연습하러 가요.”
“그래, 가자.”
에릭과 크리스는 함께 연습실로 갔다.
에릭은 크리스와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조와 찰리를 잊을 만큼 연습에만 매진했다.
“에릭. 실력이 많이 늘었네. 잘하고 있어.”
크리스가 칭찬하자 에릭은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칭찬했다고 너무 우쭐해 하지 말거라. 너의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한테 미움을 살 수도 있단다.’
“에이, 아녜요. 선배님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는걸요.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연습을 끝내고 나오니 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급한 일이라 기다리고 있었어.”
“에릭. 잘 가. 찰리 너도.”
“네, 내일 봬요.”
찰리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크리스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표정을 싹 바꿨다.
“가자.”
그 후로 에릭은 낮에는 연습을, 밤에는 조와 찰리의 괴롭힘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텼다.
시간은 물 흐르듯 흘러 오디션 날이 되었다.
“저……. 오늘 오디션은 보면 안 될까요?”
“안될 게 뭐가 있어? 우리도 가서 보니까 같이 가자.”
두 사람이 너무 쉽게 그 부탁을 들어주자 에릭은 좀 무서워졌다.
그들은 오디션이 열리는 강당으로 갔다.
“9번. 에릭 웨스트. 에릭 군 나오세요.”
심사위원이 이름을 부르자 에릭은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어떻든, 이 오디션은 그토록 나가고 싶었던 오디션이었기에 당당하게 심사위원 앞에 섰다.
“에릭 군. 준비한 노래를 불러 주세요.”
그는 바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은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 박자. 에릭의 노래는 심사위원들을 매료시켰다.
“이번 오디션 합격자는 자라스트로 역은 크리스 그린트 군, 그리고 타미노 역은 에릭 웨스트 군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여기 대본 받으세요. 열심히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뻤다. 반대로 조와 찰리는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저 녀석이 감히……!”
에릭에게 졌다는 생각에 조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건 찰리도 마찬가지였지만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날부터 에릭과 크리스는 평소보다 더 악착같이 연습에 매진했다. 공연 기간에는 경호원들이 경호를 해줬기에, 에릭은 잠시나마 조와 찰리를 잊을 수 있었다.
공연은 생각보다 반응이 좋아 3달 동안 진행되었다. 그 기간 동안 에릭은 꿈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자신이 꿈꿔온 무대 위에서 환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멋지게 노래를 부르고, 뜨거운 찬사와 박수를 받았다. 마지막 공연을 끝낸 날. 에릭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크리스와 함께 숙소로 향했다.
“이봐, 이봐. 어디 가는 거야? 우린 너에게 볼일 있는데. 넌 없니?”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조와 찰리가 다시 나타났다.
“너희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선배님은 좀 빠지세요. 우린 에릭에게 볼일이 있어서 온 거니까요.”
잊고 있던 그들을 보자 에릭은 얼굴이 새하얘졌다. 도망치고 싶은데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 착하지? 거기 얌전히 있어라!”
조는 한발 한발 에릭을 향해 다가왔다. 에릭은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웨스트, 거기 서!”
조와 찰리가 에릭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달렸을 때, 에릭은 숨을 가쁘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멈춰 섰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이다. 더 이상 달릴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이제 술래잡기는 끝이다. 빨리 우리 말 들어!”
에릭은 뒤쫓던 조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하게 되었다.
“무슨 일인데 자꾸 에릭을 가만두지 못하는 거지? 조, 찰리. 너희 왜 그러는 거야?”
뒤쫓아 온 크리스가 물었다.
“알 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시면 선배는 봐 드리겠습니다.”
“그럴 순 없어. 에릭을 어서 놔줘!”
크리스는 두 사람에게서 에릭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안‥돼요. 선배‥ 두 사람은 상대가 안 돼요…….”
에릭이 간신히 힘을 내며 말했다.
예상대로 크리스는 두 사람을 못 이기고 쓰러졌다.
“찰리, 어떡할까? 선배도 데려갈까?”
“선배는 안 건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왜?”
“우리가 저 선배 건드렸다가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었잖아……, 기억 안 나?”
“듣고 보니 그렇네. 좋아, 내가 크리스 선배는 집에 데려다 드리고 올게.”
“알겠어, 그럼 이따 봐.”
에릭은 의자에 밧줄과 함께 묶여 앉아 있었다. 그는 자기 걱정보다 부모님 걱정부터 되었다.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면 안 되는데…….’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뭐지?”
찰리가 에릭에게 다가왔다.
“부모님을 한 번 뵙고 싶습니다. 딱 한 번이어도 좋으니 부모님과 만나게 해주세요.”
“음……, 내가 왜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지? 혹시 나한테 이득이 될 만한 일이라도 할 건가?”
찰리의 말에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때 선배님은 집 외벽에 불을 질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저도, 제 부모님도 깔끔하고 편하게 갈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부탁쯤이야. 네 소원이라니 들어주지. 지금 갈 생각인가?”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찰리는 에릭을 결박하고 있는 밧줄을 풀어 주었다.
“가자. 앞장서라.”
“네.”
에릭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부모님이 계셨다.
“에릭? 에릭!”
“엄마, 아버지! 다녀왔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 와락 끌어 안았다.
“그래, 어서 오렴. 좀만 기다리렴, 같이 저녁부터 먹자.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우리 아들?”
“비프스튜요. 엄마가 만든 비프스튜 먹고 싶어요.”
“그래, 금방 만들어 줄게. 앉아서 좀만 기다리렴.”
세 사람은 오랜만에 식탁에 둘러앉아 오붓하게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엄마의 음식에 에릭은 무척 기뻤다.
이것이 마지막 식사라는 것이 씁쓸할 뿐.
맛있게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늦은 밤이 되었다. 에릭은 창밖을 향해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바깥에서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에릭은 부모님이 계시는 안방으로 올라갔다. 부모님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니 두 분 다 깊이 잠드셨는지 코를 골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엄마, 아빠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화르르
불길이 거세져 번지는 소리가 등 뒤에까지 가까워졌다. 에릭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불길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안 돼!”
“엄마?”
곤히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에델바이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에릭을 감싸 안았다.
“여기 누우려고 하지 마! 죽으려고 작정했어?”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앞으로 살 날이 길어. 왜 그러려고 하는 거야?”
“……”
에릭은 말을 못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함께 죽으려고 한다고 말하면 에델바이스는 분명 그를 지켜내려고 할 것이다. 그 불 때문에 부모님이 죽는 건 에릭도 원치 않았다. 자신이 죽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 누가 원하겠는가.
“너라도 살아.”
“싫어, 나도 엄마, 아빠랑 함께 갈 거야.”
“안 된다니까!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에릭은 아무 말 않고 에델바이스를 꼭 끌어안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꼭 끌어안게 해줘. 작별 인사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그래, 이리 와.”
두 사람은 꼭 끌어안았다.
“자, 어서 가. 뒤돌아보지 말고 집에서 빨리 빠져나가. 알겠지?”
“네.”
에릭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 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걷잡을 없이 커진 불길 때문에 걷는 것도, 숨 쉬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숨이 막혀 기절할 것 같을 때가 오면 끝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더 눈을 부릅떴다. 왼손으로는 코와 입을 막았다. 자세를 낮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사방은 온통 불바다였다. 어떻게든 불이 없는 곳을 찾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은…… 못 가겠어.’
현관문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이제 한계다. 문까지 다섯 걸음 남았을 때, 가스를 너무 많이 들이마신 탓에 쓰러졌다. 불길이 에릭 주위를 감쌌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지나가는 사람이 에릭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
“으악! 죄송해요!”
반응은 언제나 똑같았다. 에릭이 말을 하며 상대와 마주 보면, 상대방은 기겁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도망을 쳤다.
“아니, 왜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에릭은 행인이 왜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지 몰랐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반응이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주변에 있는 유리창이 큰 건물로 다가갔다. 유리창에 비친 에릭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왜 자신을 보고 도망을 갔는지 알 것 같았다.
화제 때문에 입은 화상 흉터 자국은 얼굴의 반 이상을 뒤덮고 있었다.
‘이렇게 흉측하게 변해서 다 도망간 거구나…….’
에릭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얼굴은 변했어도 노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영원히 무대에서 노래를 못 불러도 상관없어. 누군가를 열심히 가르쳐서 내 이름과 광기를 알리겠어.’
그의 눈에는 꿈에 빛나는 눈빛이 아닌, 증오와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 2026년 실로암점자도서관 독서문화프로그램 ‘힐링하는 글쓰기’의 참여자가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