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수 16 작성자 아이**04 등록일 2026-07-31 좋아요 0
도서명2026 힐링하는 글쓰기 작품집: 마음이 빛이 될 때
저자권희정, 김영락, 민경, 수연, 안시아, 엄다솜, 이민혁, 정솔, 정명섭
출판사실로암점자도서관
[소설] 리나와의 여행
하율은 음악을 들으며 편지 쓰기를 좋아한다. 답장이 오지 않지만, 기록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겼다. 수신자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물이 되기도 하지만, 악기의 애칭을 붙이고 줄줄 써내려간 편지가 가장 많다.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4월 어느 날. 하율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복지콜 택시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하율의 오른쪽엔 ‘리나’라고 이름을 지은 플루트가 있었다. 플루티스트를 꿈꾸기 시작한 순간부터 쭉 가지고 있었으니, 애착 인형보다 더 긴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율에게 리나는 자신에게 꼭 맞는 단짝, 아니, 자신의 반쪽 같은 존재다. 같은 악기도 사람마다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소리의 주인공에게 애칭을 붙였는데, 가장 가까이 있는 리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제일 많았다.
연습실에서 집까지 약 20분이 소요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길이 막혔다. 운전 기사는 연신 투덜댔지만, 하율은 오히려 좋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적을 수 있고, 음악도 오래 들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오늘은 운이 좋게도, 차 멀미를 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 비용을 결제하려던 순간, 가방에서 낯선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뚝뚝 끊겼다. 긴장한 하율은 건물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빗방울이 온몸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백하율,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래층에 사는 효원이었다. 피아노 반주를 잘 해주고, 리나의 안부를 꼭 묻는 다정한 친구다. 홈스쿨링을 함께 하며 알게 된 지 10년이 되었다.
“어? 아, 그, 그, 그냥…. 혹시, 무슨 소리 안 들렸어?”
하율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혼란스러워서 말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난 안 들리는데. 네가 너무 무리해서 환청 들리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하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효원은 편의점에 가기 위해 나왔다가 멍하게 서 있는 하율을 발견한 것이었다.
“아무튼 빨리 들어가. 비도 오는데,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
효원이 우산을 펴 들고 총총 사라졌다.
낯선 소리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차에서 내릴 땐 휘파람 소리로 들리던 것이 복도에 들어서는 순간 어린 아이가 높은 음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변해 있었다. 소리 나는 인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소리일까? 메트로놈 스위치가 켜진 걸까? 혹시, 리나에게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엄마, 나 왔어.”
“차 빨리 잡혔다더니, 좀 늦었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그냥. 비도 오고 그래서….”
하율은 어색하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열었다. 메트로놈을 꺼내 봤지만, 소리가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소리의 위치가 메트로놈이 아닌 모양이다.
“아, 정말. 뭐야?”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계속 들리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오늘 이 소리의 출처를 찾지 못하면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
딸깍, 플라스틱 케이스를 여는 순간, 소리가 멈췄다.
하율은 조심조심 세 개로 나눠진 관을 연결했다. 하율의 표현대로 말하면 리나를 불러낸 것이다. 민원이 들어올 것이 뻔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소리가 잘 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천천히 숨을 쉬는 그 순간.
“휴우~…”
갑자기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하율은 또 한 번 머릿속이 하얘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뭐야, 누가 한숨을 쉰 거야?”
하율은 혼자 중얼거리며 소리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무도 안 따라온 것 같은데….”
하율은 운지를 아무렇게나 톡톡 누르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니, 약 10년 전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리나를 만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엄마, 나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어. 동생 있는 애들은 손 잡고 학교 갈 수 있잖아.”
1년에 한 번 꼴로 조르던 하율이었다. 그 때는 시력이 어느정도 남아 있는 상태라, 비장애인 친구들의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리나가 동생이지 뭐. 투정 부리지도 않고, 귀찮게 하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척척 움직여 주는데, 얼마나 편하니?”
“뭐래? 난 엄청 진지하다구!”
하율은 장난기 섞인 엄마의 말이 알쏭달쏭했지만, 리나가 사람처럼 말을 거는 상상을 종종 하게 되었다. 우리말로 얘기해도 알아들을까? 영어로 대답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아니, 독일어나 불어로 얘기해야 할까? 목소리 높낮이와 말투는 어떨까? 그 상상을 할 즈음에 리나에게 첫 편지를 썼다. 지금은 볼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손글씨로.
어릴 때 상상한 것이라, 현실로 이루어질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한 뒤부터는 이름을 직접 불러준 일도 많지 않았다. 일기를 쓰면 혼자 벽 보고 얘기하는 느낌이 들어서 편지만 쓸 뿐.
“내가 몇 번을 불렀는지 알아?”
초등학생 여자아이 같은 소리가 들렸다. 단단히 화가 났는데, 꾹꾹 참고 얘기하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상황 파악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잘못 들은 걸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또 운지를 아무렇게나 톡톡 누르면서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나야, 나야.”
손끝에서 진동이 느껴지며, 하율이 숨을 불어넣는 위치에서 정확하게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걸까?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강제로 일어난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여전히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두 볼을 힘껏 꼬집어 보았지만, 굉장히 아팠다.
“왜 그래?”
또 말소리가 들렸다. 하율은 무서운 생각이 불쑥 들었다. 연습실 정수기에서 받아온 물, 쉬는 시간에 먹은 초콜릿이 잘못되었을까? 최면술에 걸린 건 아닐까? 손끝에 느껴진 진동, 너무나 뚜렷한 목소리. 대체 이게 뭘까?
하율이 떨리는 손으로 가까이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만져볼 때였다.
“하율아, 밥은?”
멀리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반짝, 몸과 마음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하율은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지금 연습하려는 거 아니지?”
“아니야. 근데 엄마, 아이 목소리 같은 거 안 들렸지?”
“어디서? 밖에서?”
“아니….”
하율은 몇 초 동안 말을 멈췄다.
“아까부터 좀 이상하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야?”
“안 들렸으면 됐어.”
“뭘 들었길래 그래?”
“몰라, 나도. 밥은 별로 안 먹고 싶어. 일단, 들어가 볼게.”
하율은 시원하게 답할 수 없었다. 뭘 알아야 할 텐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19년 살면서 처음 겪는 일이다.
방 안은 조용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그래서 하율이 다시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하려던 순간, 또 말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하율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이거 실제 상황인가? 또 한 번 소리 나는 곳을 봤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하율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연습하다가 혼잣말을 자주 하는 터라, 저도 모르게 무심한 말투로 툭 튀어나왔다.
“그냥…얘기하고 싶었어. 오래 얘기할 수는 없지만.”
얘기하고 싶었다? 하율은 다시 어릴 때 기억을 떠올렸다. 상상했던 일이 이루어진 걸까? 꿈이라 하기엔 너무 생생하지만, 타인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 하율은 크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연습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설마, 설마, 지금, 리나가 말을 하는 건….”
“이제 알았어?”
굉장히 답답했다는 게 그대로 묻어나는 소리에, 하율은 또 한 번 놀랐다. 게다가, 손끝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 전혀 예상 못했어. 아니,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해?”
하율은 이렇게 말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가슴이 마구 뛰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세상에서 가장 긴장되는 낯선 상황이다.
“얘기하고 싶어서 편지 쓰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 그럴 수 있지. 이제 50초 남았으니까 빨리 얘기할게. 오늘 우리가 만난 지 딱 10주년 되는 날이잖아.”
“그, 그래?”
하율은 또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10주년이라는 말이 선명하게 머리에 들어왔다. 리나가 말을 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지만,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오늘이 딱 10주년 되는 날이다. 하루가 평범하게 지나갔는데, 믿기 힘든 일이 생기다니! 기분이 묘했다.
“10년 동안 한 사람이랑 있으면 특별한 힘을 얻기도 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직접 대화할 수도 있어. 어릴 때처럼 많이 웃어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마음이 전달되면 이런 일이 생기지. 물론, 모든 악기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리나야~.”
“피곤하니까 내일 다시 얘기해. 어쨌든, 내가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다면, 오늘처럼 시간을 다 쓰고 말 거야. 제한 시간은 딱 30분이거든.”
“뭔 소리야? 30분?”
하율이 또 툭 던지듯 말했다. 한 줄기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율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동안, 시간이 다 지나간 것이었다.
정말 리나가 말하는 게 맞다면? 몇 마디 못했는데, 제한 시간이 30분이었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낯설고 무서웠던 하율은 갑자기 아쉬운 생각이 불쑥 들었다.
하루에 30분씩, 몇 번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보니, 이것도 무제한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스쳤다.
<넌 말하고 있었는데, 내가 못 들은 거겠지? 정말 미안해.>
하율은 이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리나와 대화가 가능해졌으니, 이젠 편지에 대해 답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일은 화내지 않고 차분히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혼자 툭툭 던지듯 말하던 상황이 대화가 가능한 상황으로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초등학생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하율은 그동안 리나에게 쓴 편지를 읽으며 오래오래 생각했다.
다음날, 연습을 마친 하율은 이어폰을 꽂고 음원을 듣고 있었다. 복지콜 택시가 배차되지 않아 시간을 보고, 메시지를 확인하고, 이따금 메모장에 영양가 없는 말을 쓰기도 하면서.
“앗, 잘됐다!”
어제 집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타이밍이 좋아서 매우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리나야~”
하율의 목소리에서는 아직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편하게 말해. 늘 그랬잖아.”
“어제, 화 많이 났었어?”
하율이 조심스럽게 어제 이야기를 꺼냈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화낼 일은 아니었어. 언니는 늘 같은 시간에 차를 부르고, 어제는 예상보다 빨리 배차된 거였으니까. 상상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좀 의아한 부분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겠지.”
하율은 문득, 사람의 나이와 악기의 나이는 다른 것 같다고 한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같은 열 살이지만, 이렇게 다르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났다. 대화가 가능한 시간은 때때로 궁금했던 리나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다. 사랑한다는 말, 같이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편지마다 꼭꼭 쓰고도 모자라다는 생각은 늘 하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았다. 또 이대로 시간이 다 가면 어떡하지? 하율은 어떤 말을 할지 계속 생각했다.
“참, 그런데 말이야….”
리나가 먼저 운을 뗐다. 하율은 말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2주 지나면 이 마법이 사라질 거야. 오늘이 이틀째니까 12일 뒤에.”
이 순간이 무제한이 아닐 거라 생각했던 하율의 예상이 딱 맞았다. 아무리 그래도 2주는 너무 짧은 기간이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순간은 리나가 하율에게 하고 싶었던 말,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들려줄 최고의 기회일 것이다.
“12일? 그럼, 그 안에 하고 싶었던 걸 다 할 수 있을까?”
하율은 말을 꺼내고도 당황했다. 리나가 이야기샘을 톡 건드리기라도 한 것처럼, 저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갔다.
“내 몸이 바뀌지 않으니까 한계가 있어.”
리나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차분했다. 그만큼, 하율의 손끝에 느껴지는 진동도 강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런데 갑자기 말하면 힘들지 않아?”
“힘들어하는 소리로 들려?”
하율의 물음에, 리나가 되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참, 지금 네 목소리 녹음하면….”
“안 되지. 다른 사람한테 안 들리는데….”
“아, 맞아. 그런데 왜 그런 거야?”
“몸이 바뀌지 않는 거랑 연결되는 게 아닐까? 나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가벼운 수다로 시간을 보냈다. 이럴 땐 차량이 연결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참 고마웠다.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어제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다음엔 뭐 물어볼지 미리 생각해야겠어.”
“언니가 언제부터 미리 생각했다고 그래? 늘 복불복…”
리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 줄기 바람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마법이 풀린 것이다.
“얘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던 거야? 하긴, 내가 복불복을 즐기기는 하지. 그런데 마무리가 영….”
하율은 혼자 중얼거렸다. 리나가 말을 할 수 없을 뿐, 다 듣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마법이 풀렸으니, 천천히 집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집에 도착한 하율은 음악을 들으며 어제와 오늘의 일을 천천히 생각했다. 어제는 봉인된 상태라 헤드 부분에서 휘파람 소리가 난 것이었고, 연습할 때와 같은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말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다 되었을 땐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갔으니, 시작할 땐 반대로 들어왔을 것이다. 하율이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데다, 소리가 나는 위치가 아니기에 그 신호를 듣지 못했을 뿐. 어쨌든, 하나씩 생각하니 퍼즐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닷새가 지나는 동안, 하율은 리나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레슨이 끝난 뒤엔 “나도 힘들어.”하며 한숨을 쉬고, 높은 소리로 웃는 날은 같이 깔깔거렸고, 눈물 펑펑 쏟은 날에는 차분하게 위로해 주었다. 투닥투닥 말장난을 할 땐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그동안은 소리 없이 전달되는 어떤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하율과 똑같은 소리, 똑같은 말로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는 문장이 마무리되기 전에 마법이 풀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하면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지 금방 익힌 것 같았다. 들은 대로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니, 문장이 자연스럽지 않아도 적당히 걸러서 들은 하율이었지만.
마법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되는 날, 연습실에서 음악을 듣던 하율은 현장감 있는 연주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와,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야. 아니, 연주하시는 분이 화면 밖으로 나올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못할 것도 없지.”
1분 전부터 대화가 가능해졌지만, 리나는 하율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동안은 먼저 운을 뗐지만, 이젠 하율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 모양이다.
“그게 가능해?”
“응. 방법은 크게 두 가지야.”
리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율의 감정 변화를 천천히 보는 것 같았다. 얘는 갑자기 만능이 된 거야? 하율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리나는 그걸 다 읽은 듯 했다.
“어떻게 할 수 있는데?”
“이어폰 줄을 연결 통로로 쓰는 거야. 이 방법은 잘 준비하면 괜찮고,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면 위험해.”
“그렇겠지? 우리가 같이 가는 방법도 있어?”
“평소처럼 악보 보고 연습하다가 순식간에 휙 빨려 들어가는 건데, 어떤 도구 없이 우리 몸만 쑤욱 빨려 들어가게 될 거야.”
도구 없이, 몸만 쭈욱 빨려 들어간다니! 하율은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리나를 손에서 놓치게 되면 리나가 굉장히 위험해질 것이고, 리나와 떨어지지 않아도 하율의 손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것 역시 굉장한 위험 요소다.
“지금 쓰는 물건들 중에, 옛날에도 있었을 것들을 챙겨가면 도움이 될 거야. 휴대전화는 완전 방전될 거고…. 물병이나 지팡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기록하고 싶으면 점자판이랑 작은 수첩 정도.”
“야, 근데 말도 안 된다. 30분 안에 어떻게 갔다 오니?”
“남은 시간은 4일이야. 이틀 동안 30분 더 연장한다 생각하고 해보는 거지. 그런데 이걸 왜 내가 계산하고 있는 거지?”
“네가 다 설명해 놓고, 뭐래? 누가 보면 혼자 사전 답사 하고 온 줄 알겠어. 두 가지 방법을 동시에 쓸 수도 있을까?”
“응용하면 다양하게 쓸 수 있어. 정답이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두 번째로 얘기한 방법이 아니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하율은 갑자기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리나가 위험하지 않게 움직이려면, 다른 관악기가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 안에 마법의 힘을 불어넣을 수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마술 피리 같은 것이 있다면 자신도, 리나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집에 뭐가 있을까? 리코더?”
“아하, 그래! 호신용 호루라기도 괜찮아. 관악기가 연결 통로가 되는 거니까. 마법의 힘을 불어 넣어 줄 한 줄기 바람이면 뭐든 되지. 하지만, 그걸 나랑 멀리 떨어뜨리면 좀 힘들어.”
리나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촉박한데….”
“초 단위로 계획을 짜야 해. 하고 싶으면 오늘 밤에 천천히 고민해 봐.”
하율이 약간의 한숨을 섞어 말하자, 리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리나야~ 넌 누굴 만나고 싶어?”
“어떤 사람을 만난다기보다는…”
리나가 말을 멈췄다. 하율은 리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하율은 나무 플루트 소리를 들으며, 이 악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보는 그 악기의 마음이 궁금했다. 그리고 플루트가 나무에서 금속으로 개량된 첫 순간도 무척 궁금했다. 리나는 지금, 그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율의 예상이 맞다면.
“수다 떠느라 시간 다 쓴 게 너무 아쉽다. 이걸 미리 정하고 왔다 갔다 했어야 하는데.”
“그럼, 몸도 마음도 엄청 힘들지 않을까?”
하율의 모든 것을 아는 리나의 말은 굉장히 진지했다. 지금은 상상만 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하게 툭툭 던지듯 말해도, 직접 경험하게 되면 극도로 긴장하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그래서 꼭 함께 움직이고 싶었다. 수많은 낯선 것들 사이에 있는 익숙한 것 하나가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요소가 되니까.
“현재에서 멀어질수록 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그래, 그게 문제라면 문제지. 그래서 빨리빨리 진행하는 게 좋다고 한 거야. 누굴 만날지, 질문도 미리 정하고. 그런데 번역기를 쓸 수 없으니까 소통이 어려울 수 있어.”
“그럼, 넌 다른 나라 말도 알아들을 수 있어?”
“어? 글쎄…. 나도,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몰라.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 게….”
하율은 말 없이 웃었다. 생각해 보면, 리나가 그렇게 말하는 건 당연했다. 둘이서만 보낸 시간이 제일 많으니, 리나에게 가장 익숙한 사람 역시 하율일 것이다. 시야를 조금 더 넓힌다 해도 엄마, 아빠, 효원이, 선생님 정도. 생명을 불어넣어 준 첫 순간부터 우리말을 들었으니, 다른 말이 들리면 이게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나의 마법이 풀린 뒤, 하율은 천천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낭만 시대 프랑스로 가서 드비엔느를 만나면 악기 두 개 연주하며 곡 쓰는 게 힘들지 않은지 물어보고 싶었다. 베토벤을 만나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어떻게 작곡하는지 묻고 싶었다. 모차르트를 만나 금속으로 개량된 플루트 소리를 들려주고 오고 싶었고, 바흐나 헨델을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그보다 더 오래전 그레고리안 성가가 초연되던 시대로 가보고 싶기도 했다. 움직이기 제일 좋은 건 서양 악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시점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과 대화가 통할 테니, 소통이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하율의 생각은 그랬다.
저녁 식사를 마친 하율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전화로는 영상을 듣고, 점자정보단말기로는 두서없는 문장들을 적었다. 식사 전에 했던 생각들을 버킷리스트처럼 정리해 두기도 했다. 과거로 가면 이 메모를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간단히 정리해야 초 단위로 계획하기 쉬울 것 같았다. 질문과 답의 길이를 합했을 때 20초를 넘기지 않으면 가장 좋을 것 같아서 그것도 적어 두었다.
<작은 몸으로, 어른스럽고 소심하고 귀엽고 발랄하고 차분하고 다 해.>
하율이 오늘 메모장에 처음 적은 것이 이 문장이었다. 이 상황에 익숙해지고 나니, 리나가 신기했다. 리나가 말을 시작한 순간부터, 어릴 때 상상하고 믿었던 것들이 모두 사실인 것처럼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랑을 주면 어떤 방법으로든 되돌려 주는 것 같아.”
레슨 때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확 와닿았다.
두어 시간을 책상 앞에서 보내고, 이어폰을 꽂은 채 막 누웠을 때였다. 몸이 무언가에 둘러싸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점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귀에 들리는 음악 소리가 그대로 유지되어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얼마쯤 갔을까…. 소리가 뚝 끊겼다. 배터리가 방전된 것처럼, 보이스오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하율의 두 발이 땅에 닿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하율은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낯선 언어가 들리고,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옛날 만화에서나 들었던, 마차가 달리는 소리도 들렸다. 도대체 어디로 온 것일까? 반쯤 잠이 오는 상태라,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하율은,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흰 지팡이 없이 움직이니 보폭이 아주 좁아졌다. 보도블록도, 안내해 줄 사람도, 택시도 없는 울퉁불퉁한 길이 이어졌다. 돌멩이가 굴러다니고, 장애물도 많았다. 평소보다 좁은 보폭으로 걸으니, 길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제야 리나의 말이 떠올랐다.
“이 방법은 잘 준비하면 괜찮고,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면 위험해.”
그렇다. 지금 하율은, 잠을 자려다가 무방비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소리로 보아, 활동량이 많은 시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여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을 굴려야 했다. 한국은 지금 밤이니, 다음 날 아침이 되기 전에 돌아가야 할 텐데, 가능할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율은 목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누구도 하율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어쩌면, 말을 건네는 사람이 한 명쯤 있었겠지만,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현지인들 입장에서도 그냥 지나치는 게 당연했다. 미래에서, 그것도 타국에서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할 현지인은 없으니까.
몸이 무거웠다. 힘이 쭉쭉 빠졌다.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못했으니, 몸 안의 모든 에너지가 소진될 수밖에.
걷고 또 걷다가 가까스로 나무 의자를 찾았다. 하율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혼란스럽고 두려웠다. 이대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면?
걷는 동안 용기 내서 여기가 어디인지 몇 번을 물었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 버렸다. 두려움이 확 밀려오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쑤욱 빨려 들어온 미지의 세상. 사람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작위 재생으로 음악을 듣다 왔기에,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왔는지 파악하기가 더 어려웠다. 게다가 하율은, 음악사를 잘 아는 편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거실로 나오던 하율이 오지 않자, 무슨 일인가 하고 방문을 열어본 선영은 깜짝 놀랐다. 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율 아빠, 큰일났어.”
“뭐라고? 세상에… 얘가 갑자기 어디로 간 거야? 나 오늘 시간 못 빼는데. 당신이 하율이 찾으면 연락 줘요.”
“알았어요. 얘가 가는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어딘가에 있겠죠.”
선영은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딸을 찾아 나섰다.
“효원아, 하율이 어디 있는지 아니?”
“저희 집엔 안 왔어요. 연락도 없었고요.”
“그래?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혼자 음악 들으면서 앉아 있는 걸 봤는데….”
“백하율, 얘가 어디로 사라질 만한 애가 아닌데… 같이 찾아봐요.”
선영과 효원은 함께 하율을 찾아 다녔다. 연습실에 전화하고, 혼자서 자주 가는 카페와 편의점에도 갔지만, 하율이 보이지 않았다. 하율의 동선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사라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점심 때가 되자, 선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어머님, 하율이랑 연락이 안 되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선생님, 저희도 지금 하율이를 찾고 있어요.”
“네? 뭐라고요?”
“실종 신고를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어요.”
“어머님, 지금 어디에 계세요?”
“별별 스튜디오 앞에요.”
“아, 그럼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하율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고 있는 주혜도, 갑작스런 실종 소식에 깜짝 놀랐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갑자기 사라진 데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있을 터였다.
별별 스튜디오 옆 카페에서 세 사람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혹시, 평소와 다른 모습이 있었나요?”
주혜가 차분하게 물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물었던 적이 있어요. 아이 목소리 같은 거 못 들었냐고 했었어요.”
“아이 소리라… 그다음은요?”
“글쎄요, 그다음엔 별다른 게 없었어요. 혹시, 선생님은요?”
이번에는 선영이 물었다.
“며칠 전 레슨 때, 음악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고 했었거든요. 어쩌면, 그 말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혹시, 방에 있는 물건들은 그대로 있나요?”
“네. 메트로놈도 그대로 있고, 그러고 보니 가방을 안 메고 간 것 같아요.”
“연습실에 혼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세요?”
“아뇨, 전혀요.”
주혜는 리나를 떠올렸다. 리나라면 하율이의 모든 걸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참, 제가 오래된 신문 기사를 하나 가져왔는데요….”
주혜는 캡처한 사진을 선영에게 보여주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홍 기자, 실종 한 달째 무소식…>
제목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10년 전 기사였다.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다가 돌연 사라진 홍 기자를 아내와 자녀들이 애타게 찾고 있다.>
세 사람은 기사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주혜는 연습실에 들어선 순간, 무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래, 나도 오래전에 내 악기한테 이름을 지어 줬었지. 지금 부르면 대답해 줄까?
“로디, 혹시, 알고 있는 게 있어?”
연습을 시작하려다 슬쩍 질문을 해 봤다. 그 순간, 한 줄기 바람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들어오는가 싶더니, 말소리가 들렸다.
“와, 엄청 오랜만에….”
“어머, 깜짝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주혜의 표정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몇십 년 만에 이름을 불러줬는데, 바로 대답해 주다니!
“왜요?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음, 그러니까….”
주혜는 침착하려 애썼다. 하율도 이렇게 리나와 대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율이가 어디에 있을까? 진짜로 며칠 전에 말한 대로 되었을까?”
“리나가 같이 가지 않았다면, 어떤 도구도 없이 갑자기 빨려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 시절에는 없던 물건들은 못 쓰게 되니까 연락이 안 될 거고요.”
“그럼, 어떡하지?”
“리나가 신호를 보내야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요? 리나에게 마법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내가 리나를 만나면 같이 하율이를 데려올 수 있을까?”
“음~… 한 가지 확실한 건, 불시착하기 전에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게 제일 안전해요.”
주혜는 이 부분에 100퍼센트 동의했다.
하율은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게 되면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오선지 악보를 보며 수업하다가 갑자기 소리만 듣고 하게 된 날도, “선생님 목소리는 익숙한데, 어쩐지 낯선 느낌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나마, 이렇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했고, 익숙한 소리에 귀 기울이며 차근차근 적응해 나가도록 도왔다. 그래서 지금의 하율은 점자 악보를 잘 읽고,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신만의 속도로 잘 자라고 있었다. 미지의 세상으로 불시착한 지금, 인생 최대 위기일 것이다.
“리나가 많이 힘들겠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두 사람이 음악을 같이 듣다가 한 사람만 빨려 들어갔다면 좀 쉬워질 텐데….”
“하율이는 복불복으로 듣는 걸 좋아하는 아이라, 어젯밤에 뭘 들었는지 전혀 감이 안 오네. 리나가 알고 있을까?”
“알고 있겠지만, 리나가 하는 말은 하율이에게만 들릴 가능성이 높아요. 지금 제 얘기도 다른 데로 나가지 않을 걸요, 아마도….”
“아, 이게 그렇게 되는 거야? 그렇구나.”
“하율이는 7년 전에 큰 산 하나 넘었으니,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오겠죠. 저는 하율이를 믿어요. 보기엔 약해 보이지만,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잖아요.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마음이 자라는 게 보여요.”
“그래, 기다려 봐야지.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안심이 되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
몇 초의 침묵이 흐른 뒤, 바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대화가 가능한 시간이 짧았지만, 그 안에 충분한 답을 얻어서 다행스러웠다.
<어머님, 같이 기다려 보아요. 하율이는 오늘 안으로 돌아오겠죠. 하율이가 집에 오면 스스로 마음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많이 무섭고 혼란스러울 테니까요.>
주혜가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하율이 오늘 안에 돌아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주혜는, 로디의 이야기로 확신할 수 있었다. 다만, 여기서 리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하율이 믿는 대로 리나에게 생각이 있고 마음이 있다면 가끔 이러쿵 저러쿵 투닥거려도, 긴 시간 떨어져 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나타나지 않는지, 무슨 일이 있는지…. 오히려 스스로 움직이고 찾고 알아볼 수 없어서 더 답답하지 않을까? 할 수만 있다면 리나를 만나 함께 움직이고 싶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이 큰 문제지만.
하율은 다시 일어서 보려 했다. 혹시, 통신이 되는 곳이 있을지 알아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앉아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잠들기도 하고, 소리 없이 울기도 했지만, 말 없이 이상한 질감의 종이 한 장을 건네준 사람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계속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걸까? 리나, 엄마, 아빠, 선생님, 그리고 효원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리나의 신호가 여기까지 들릴까? 엄마 아빠의 이야기 소리, 차분한 효원이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따뜻하게 노래하는 듯한 선생님의 플루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하율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기서 정신을 잃으면 정말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았다.
어지럽고 배고프고 추웠다. 몸이 무겁기도 했다. 하지만,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율은 이곳에 오면서 느낀 것들을 하나하나 생각했다. 들리는 소리가 다른 만큼, 공기도 달랐다. 매연 냄새가 전혀 없는, 요즘은 나무가 많은 곳에 가야만 마실 수 있는 공기. 미리 준비하고 왔다면 공기가 좋다고 했을 것이다. 바람의 온도가 달랐지만, 계절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춥게 느껴질 뿐. 또 뭐가 있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몇 시일까? 집에 가면 몇 시가 될까? 누군가 자신을 데리러 와 주면 정말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았다. 어느 순간, 생각이 뚝 멈추고 또 긴 시간이 흘렀다.
“하이고~ 나 참….”
갑자기 들린 한국말에, 하율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붙었다. 처음 듣는 남자 목소리였지만, 일단 만나면 돌아갈 방도가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소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 학생.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중년 남자가 놀란 얼굴로 말을 걸었다.
“누구, 세요? 혹시, 여기가 어디인지 아세요?”
하율이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혹시, 어떤 음악을 듣다가 왔니? 가장 마지막으로 들은 음악을 떠올리면 여기가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거야.”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어떡해요….”
“체력이 바닥나서 머리가 안 돌아갈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걸 보면, 같은 장소에 온 건 확실해.”
남자는 무척 반가워하며 하율의 옆에 앉더니,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줄줄 늘어놓은 이야기를 요약하면, 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면서도 틈틈이 음악 감상을 하는데, 어느 순간 이곳에 불시착하고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율도 본인이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천천히 말했다.
“참, 10년 전엔 다른 장소로 왔다고요? 그럼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거리를 돌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 난 외국어를 잘 못 들어서 그런가? 10년 동안 같은 언어를 들었지만,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하율은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생각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저도, 돌아가지 못하면 어떡해요? 집에선 실종 신고를 하고 난리도 아닐 텐데…. 그리고 너무 무서워요. 아무것도 없이 와서….”
“음악을 하고 있다면…. 분명 방법이 생길 거야. 별거 아니지만, 이거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
남자가 빵 한 조각을 건넸다.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이걸 다 먹으면….”
“걱정 말고 어서 먹어. 조금이라도 먹어야 생각도 하고, 돌아갈 힘이 생기지. 긴 시간 아무것도 못 먹으면 잘 돌아가던 머리도 안 돌아가.”
“네? 네…”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빵 한 조각을 순식간에 다 먹었다. 남자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우유 한 병도 건네 주었다. 늘 먹던 빵과 우유랑 맛이 달랐지만, 먹고 나니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눈이 전혀 안 보이는 거야?”
“네. 어릴 땐 조금 봤는데, 지금은 그래요.”
“그럼, 이 의자 찾는 것만도 굉장히 힘들었겠구나.”
하율은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처음 만난 아저씨랑 거리를 떠돌며 살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같은 말로 대화할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되었다.
“난 이미 늦었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은 다 다녀 봤지만, 잘되지 않더라고.”
“저도, 제 전화기가 먹통이에요.”
“걱정하지 말고, 침착해야 해. 이어폰 줄이 연결 통로가 된다면 분명 길이 열리겠지.”
“아저씨도 이어폰이 있잖아요.”
“난 이거 하나뿐이야.”
“앗, 그러고 보니, 저는 가방에 여분이 있어요. 지금은 그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요.”
하율은 집에 이어폰을 하나 더 두고 온 것을 생각해 냈다. 어쩌면, 그 이어폰의 위치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될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하율의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작은 휘파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뚝뚝 끊기고 멀리서 들리는 느낌이지만, 9일 전에 집에 오면서 들은 소리와 유사했다.
“어? 이, 소리는… 리나? 맞을까? 아닌가?”
들리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하율은 리나를 불러 봤다. 정말 리나의 신호가 맞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여기서 벗어나 한국으로 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순조롭게 될 것 같았다.
“리나가 누구야?”
“제 악기 애칭이에요. 정말로 리나가 맞다면, 이 소리가 어떻게….”
하율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제대로 먹지 못해서 환청이 들리는 것은 아닐까? 이어폰을 꽂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보았다. 손바닥으로 주변의 소리를 차단하면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가 더 선명해질 테니까. 첫 소리와 다음 소리 사이의 간격이 길고 뚝뚝 끊기기는 했지만, 이어폰에서 들리는 것은 맞았다.
“어쨌든, 돌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건강하게 잘 지내라.”
“아저씨, 곧 구하러 올게요. 정말이에요.”
“아니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 난 괜찮아.”
“아니에요. 꼭 구하러 올게요. 이 장소에서 다시 만나요.”
남자가 천천히 사라지자, 하율은 또 다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리나의 신호가 확실하다면, 하율은 무사히 방으로 도착할 것이다.
“깜짝이야!”
하율은 두 다리가 땅에 닿은 순간,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보이스오버가 갑자기 켜지고, 모든 알림음이 한꺼번에 들렸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시간을 보니,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하루를 다 쓰고 말았구나…”
하율은 중얼거리며 방 안에 있는 것들을 확인했다. 모든 것이 잠들기 전 그대로였다. 또 한 번,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스피커로 듣는 것처럼 가까웠다. 반가웠다. 그리고 안도의 숨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방을 여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하율은 조심조심 세 개의 관을 연결하는 순간부터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리나야~….”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손끝에 진동이 느껴지며 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 소리지만, 따뜻했다. 보이지 않는 온기로 모든 걸 감싸 안아주는 느낌.
“네가 보낸 신호가 맞았구나….”
하율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행이야. 나도 언니 못 만나는 줄 알았어. 신호에 반응이 없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들리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리나는 하율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하율은 갑자기 시력을 잃던 날처럼 극심한 공포감이 확 덮쳤을 것이다. 어디인지 모르고 착륙한 낯선 세상. 다른 소리, 다른 공기, 익숙하지 않은 것들과 마주했을 긴 시간. 하율의 손끝에서, 숨소리에서 그 모든 게 그대로 전해졌다. 이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하율의 손에 모든 걸 맡긴 채 그대로 있었다. 익숙한 촉감, 익숙한 소리가 공포감, 긴장감을 멀리멀리 밀어낼 테니까. 그리고 신호를 보내는 데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썼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백하율,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여태 어디 있다 이제 오는 거야?”
방문이 열리고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하율은,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상태였다.
“기다려줘요, 지금은….”
리나가 엄마에게 하는 말이 하율에게만 들렸다. 그걸 깜빡 잊은 채 이야기를 하려다 뚝 멈췄다. 자신의 작은 신호, 엄마의 목소리. 그다음으로 이 감정을 밀어낼 것은 뭘까? 리나는 하율에게 익숙한 것들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듯했다. 오선지에 음표들을 하나하나 그려 넣듯이.
“그만 울고, 나와서 밥 먹어.”
하율은 밥 먹으라는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천천히 일어서서 걷는 모습이 아슬아슬했지만, 무사히 방을 나와 식탁에 앉는 데에 성공했다. 익숙한 것들이 하나씩 손끝에 닿을 때마다 하율의 마음도 서서히 평온함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니,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리나의 신호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하루 종일 뭐 했어?”
“아무것도 못했어. 갑자기 빨려 들어갔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고생했네. 10년 전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더라.”
“기자 아저씨 말하는 거야?”
“어머, 만났니?”
“수많은 외국어들 사이에서 너무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 익숙한 우리말이 들리는 거야. 진짜 깜짝 놀랐어.”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율은 몸도 마음도 충전되는 기분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왔다.
“고마워, 리나야~. 너 아니었으면 난 영영 돌아올 수 없었을 거야.”
리나는 말이 없었다. 밥을 먹는 사이에 마법이 풀렸거나, 먼 곳까지 신호를 보내느라 지쳤을 것이다.
하율은 가방을 정리하며 금방 단서를 찾아냈다. 플라스틱 케이스 위에, 반으로 접힌 이어폰이 있었다. 원래는 다른 주머니에 넣는데, 허둥대다 잘못 넣은 것이었다.
“아, 세상에… 이게 이렇게 된다고?”
작은 실수가 위기로부터 구해줄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하율은 접힌 이어폰의 위치를 자세히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소리가 시작되고 끝나는 이어폰의 양쪽 끝이 맞닿은 채, 휘파람 소리가 나는 위치에 정확히 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리나의 작은 신호가 이어폰 줄을 타고 하율이 꽂고 간 이어폰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아주 오래 걸렸을 테지만.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다는 걸, 넌 알고 있었지? 정말 궁금해. 내일 꼭 말해줘.>
하율은 메모장에 짧게 적었다. 그리고, 잠깐 만났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에게도 분명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돌아오고 싶은 장소가 있고,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율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 날 오후, 하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앗, 선생님.”
“하율아, 괜찮니?”
“네, 저는 괜찮아요. 리나 덕분에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행이야. 어머님이 많이 걱정하셨어. 너도 많이 놀랐지?”
“진짜 힘들었어요.”
“그래. 네 마음이 어땠을지 다 알아. 길게 통화할 수 없으니까,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 주에 만나서 하도록 하자.”
전화기로 들리는 목소리가 따뜻했다. 어제 저녁부터 하율에게 익숙한 것들이 가까이 와 닿아, 제대로 돌아왔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래서 긴장감 없이 편하게 연습했다.
몇 시간 뒤. 좁은 연습실엔 침묵이 흘렀다. 하율은 말 없이 리나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폰을 꽂기가 무서워진 하율은,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조금 멀리 두고 들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내일, 한 시간 반 동안 어디로 가볼까?”
리나가 가장 먼저 한 말이다.
“그 기자 아저씨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
“만나고 싶은 사람은 못 만나는데, 괜찮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그 아저씨가 만났을 수도 있잖아. 취재했을지 누가 알아?”
“아하~ 그럴 수 있겠네. 한 번 해보자. 성공하면 의미 있는 일이 될 거야!”
하율은 리나와 의논을 시작했다.
“그런데 넌 이대로 갈 수 없잖아.”
“그 키링을 걸어 줘. 그 안으로 신호를 보내면 소통할 수 있을 거야.”
“키링?”
하율은 키링을 떠올려 보았다. 작년에 효원이 리나 동생이라며 선물해 준 플루트 미니어처 키링. 그걸 받은 날, 하율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며 아쉬워했었다. 잊고 있었는데, 이걸 이렇게 쓸 수 있을 줄이야! 리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어폰은 두 명 다 양쪽으로 꽂고 있어야 하니까 두 개 꽂을 수 있는 선을 찾아봐. 이어폰이 세 개 있으면 제일 좋아. 신호가 이어폰으로 들리면 통로가 열리잖아.”
“참, 그런데 그 먼 곳까지 신호가 들릴 줄 몰랐어.”
“난 1초에 한 번 신호를 보냈어. 너무 멀어서 몇 번이나 들렸을지 모르지만.”
1초에 한 번이라 하기엔 소리 사이의 간격이 길었지만, 리나는 단 한 번이라도 닿기를 바라며 그동안 모아둔 에너지의 몇십 배를 썼을 것이었다. 하율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랬었구나. 참, 기자 아저씨가 나랑 같은 시대로 떨어진 걸까?”
“같은 시대일 가능성이 높지. 고전에서 낭만으로 짧은 시간에 휘리릭 바뀌지 않잖아.”
“아, 그래, 그렇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겠어. 정말 고마워~.”
“난 그저 방법만 알려줬을 뿐인 걸.”
“그게 제일 큰 거잖아.”
“꼭 성공하면 좋겠다!”
하율은 보이스오버 소리를 듣고, 천천히 집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난, 언니가 무사히 와준 게 더 고마워. 지금 아니면, 이 마법이 풀리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리나가 잠시 말을 멈췄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문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마음이 그대로 전달될지 잠깐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율은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하율은 언제든 리나에게 말할 수 있지만, 리나가 말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내일 기자 아저씨를 구하러 갔다 오면 얘기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나 지금 정말 행복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매일 들여다볼 수 있어서~.”
하율은 리나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리나가 멈추지 않고 길게 말했다. 여태까지 한 이야기 중에 제일 길었다.
“나도, 많이 사랑해~!”
그 말이 하율에게 들리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따뜻했다. 선생님 말씀이 딱 맞았다. 리나는 또박또박, 사랑을 말했다. 하율이 들을 수 있게.
집에 돌아온 하율은 이어폰 허브, 미니어처 키링, 이어폰 세 개를 찾았다. 그리고 이어폰 두 개를 미리 허브에 연결하고 다른 이어폰은 정확히 반으로 접어 악기 가방에 넣었다. 내일, 리나가 신호를 보내면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과거로 갈 것이다.
<내일이면 리나가 직접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나겠지? 갑자기 엄청 길게 얘기할 줄 몰랐어. 이제 편해지고 익숙해졌는데, 어느새 마지막이라니! 실감이 안 나.>
하율은 이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목소리로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에서 손끝으로 줄줄 쏟아져 나왔다.
하율은 연습실에 착륙할 생각을 하며, 복지콜 택시를 부르지 않았다. 기자 아저씨가 있으면 집으로 돌아오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취재 다니는 사람은 지리를 잘 알 테니까.
“시작해!”
키링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방송에서 나오는, 여자 목소리를 변조한 듯한 소리였다. 하율은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가방을 멨다. 이틀 전에 집에서 들었던 그 영상을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율은 가방을 멘 상태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음악이 끊기고, 전화기가 멈췄지만, 이번에는 무섭지 않았다. 리나가 함께 있으니까.
두 다리가 땅에 닿는 순간 낯선 말이 들렸지만, 이번엔 무섭지 않았다. 이어폰 줄을 타고, 리나가 끝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기자 아저씨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천천히 걸어가 봐. 그 나무 기둥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오늘은 물병도 있잖아. 전처럼 힘들지 않을 거야.”
이어폰으로는 리나의 원래 목소리가 들렸다. 참 신기했다. 리나가 물병 이야기를 해서 생각해 보니, 가방에 흰 지팡이도 있었다. 하율은 이틀 전보다 당당하게 걸었다. 그 장소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말이 들리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지친 하율이 가방에서 초콜릿을 꺼내 입에 넣었다. 옛날에도 존재했을 법한 것들을 챙기려 애써서인지, 가방에 있는 먹을 것들이 아주 멀쩡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리나의 마법이 풀리면 돌아가기 힘들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어.”
“그래? 그 아저씨, 어디 계시지?”
하율은 멈춰 서서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국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걷고 또 걷느라 시간이 흘러, 남은 시간은 단 3분.
“어머, 학생. 여기에 왜 또 왔어?”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빨리요! 빨리 이어폰 꽂으세요. 여기요!”
하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자는 얼떨결에 받아 든 이어폰을 꽂았다.
“휴우~ 이제 됐어!”
하율이 꽂은 이어폰으로는 리나의 원래 목소리가, 기자에게는 작은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기자는 구하러 오겠다고 했던 하율의 말을 떠올렸지만, 반신반의하고 물었다. 천천히 머뭇거리며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의 몸이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율은 안도의 숨을 쉬었다. 도착하기 전에 리나의 마법이 풀린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머, 세상에… 내가 10년 만에 돌아오게 되다니!”
연습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방을 둘러보던 홍 기자가 탄성을 질렀다.
두 사람은 연습실 근처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하율은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직접 인터뷰하지는 못했지만, 지켜본 것들을 기록해 두었어. 잘 정리해서 sns에 올려볼 테니, 팔로우해서 읽어 봐.”
신기하게도 하율이 사는 동네가 바로, 기자가 10년 전에 살았던 곳이었다.
“어머나, 이게 누구야? 어디 갔다 10년 만에 왔어?”
택시 기사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기사님 아시는 분이에요?”
“오랜 친구였지. 집이 다 없어졌을 텐데, 어디로 갈 생각이야?”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지. 학생, 정말 고마워.”
사흘 치 대화 시간을 다 썼지만, 하율은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써 나갔다.
<리나야~ 정말 고맙고 즐거웠어. 다시 이런 기회가 오지 않더라도, 오늘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
* 2026년 실로암점자도서관 독서문화프로그램 ‘힐링하는 글쓰기’의 참여자가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