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파란시선 50권. 2017년 「시와 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오영미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만약 당신이 시집,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익숙한 위로와 성찰을 기대했다면 이 시집을 펼치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순진한 화자가 의도치 않은 사건을 만나 상처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성장하는 서사란 이 시집과 어울리지 않는다. 세계가 바뀔 것이라는 믿음,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박탈당한 자가 표면적으로는 이 시집의 주인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기를 학대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 폭력적인 세상을 끝장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만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오영미의 화자는 여성 화자이다. 세계의 폭력성은 여성에게만 선별적으로 작동된다는 자의식이 이 시집의 가장 강력한 발화 지점이다. 오영미의 시집은 남성 권력으로 젠더화된 세계가 끊임없이 여성 화자를 평가하고,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며, 물화하고, 언어를 빼앗고, 구석으로 내몰고, 혐오를 내면화하도록 강요하며, 성적으로 착취하고, 폭력적으로 신체와 정신을 침탈하는 일들이 태연하게 반복되는 그런 현실을 보여 준다. 마치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되풀이되는 고통 속에서 오영미의 여성 화자는 세계의 불의와 불공정함을 고발하고, 또 강력한 분노로 몸서리치지만 바뀌지 않는 현실 질서 앞에서 제 몸을 깨트리고 망가뜨려 저항의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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