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파란시선 45권. 「시와 표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고주희 시인의 첫 시집으로, '당신을 앓는 나'가 가학적인 치유의 역설을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쓴, 상실의 체험에 관한 섬세한 심리 진술서의 성격을 지닌다. 병증의 언어를 시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어떤 형태로든 미학적 지향성을 내포하며, 고통에 대한 미적 거리감은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의 거리감으로 변주된다. 그런데 고주희의 작업은 통상 시가 병증의 언어들을 흡수하는 내면화와 승화의 방식과는 다른 경로를 걷는다. 고주희는 가능한 깊이, 최대한 충실하게 앓기를 원하는 듯하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쓰라린 탐닉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주희의 시에서 '나'가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고통의 기원인 당신을 대하는 자세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당신을 상실한 고통을 앓는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데, 나의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나의 의지로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고통은 나의 것임에도, 그 중심은 나의 의지와 능력이 닿지 않는 외부에 있다(또한 나의 내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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